1. 지역감정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해의 초여름, 수원에 있는 경기대학교에서 열렸던 문학관련 행사에 찾아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그저 지루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도우미 대학생들의 가슴에 있던 명찰과 허름한 구내식당에서 나왔던 카레밥, 이호철 선생님의 잠오는 글쓰기 강의, 우리를 보고 촌놈이라고 비웃던 택시기사.
그리고......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날의 행사에는 전국에서 온 많은 고등학생들이 참가했었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와 이름이 같은 한 친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름이 같다는 사실이 왠지 반가워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이야기를 나누자 그 친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습니다.
"어디사냐?"
"어, 대구사는데."
"......"
그 친구는 살짝, 아주 살짝 웃으면서 지역감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어렴풋이 그 '감정'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자 마치 내 마음에 날카로운 칼로 '그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새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색했던 대화는 곧 끝났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친구가 '지역감정'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 지었던 어색한 웃음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2. 배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새내기들이 늘 그렇듯이 '오리 꽥꽥' 을 하면서 신입생 환영행사에 따라갔습니다. 수안보에서 열렸던 행사는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생겼습니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다시 켜지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에 무대에는 붉은 깃발을 든 몸짓패들이 섰습니다. 그리고 그날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민중가요를 부르며 그 커다란 깃발을 휘둘러댔습니다.
왜였을까요? 나는 마음 속에서 심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날 일부 단과대 학생들은 행사장을 떠나기도 했거든요. 그 선배들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검붉은 깃발과 노랫말 속에 들어있던 '동지'라는 말만 기억에 남았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들의 그 시도는 지금까지도 내가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의 나는 그들이 불렀던 운동가요를 마음 속에서 다시 꺼내어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따금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나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라든지 하는 노래를 불러대기도 합니다. 게다가 내 친구들도 그런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날의 행사에서 왠지 거부감을 느꼈다고 소곤대던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 온데간데 없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그건 나의 대학생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과는 공대가운데에서도 독특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배는 후배들에게 민중가요를 가르쳐주었고 학생회실에는 늘 기타를 치는 형이 있었죠. 공대학생회장도 우리과 선배였고 농활에서는 항상 우리 과가 가장 많은 참여율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해마다 5월 18일이면 늦은 오후에 선후배들이 모여 커다란 TV로 비디오를 보기도 했습니다. 바쁜 학업 짬짬이 노래패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고 몸짓패들은 여러 행사마다 나가서 흥을 돋구었습니다.
MT 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바위처럼'을 부르며 손으로 재미있는 율동을 했었습니다. 게다가 내가 잠깐 활동했던 '작은 몸짓'이라는 소모임은 '언론을 바로 보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나는 학교 근처 식당에 즐비하게 놓여있는 조선일보를 보면서 '안속아' 라고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지금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니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네요. 그때의 선배와 동기들은 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 대다수도 저처럼 조선일보를 보면서 '안속아' 라고 중얼거릴지도 모르겠네요.
가끔은 안타깝습니다. 요즘 후배들에게는 신문 기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에게 신문 스크랩을 내밀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던 선배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3. 지역감정 II
작년 1월 사촌누나가 결혼했습니다. 신랑은 광주사람인데 모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촌누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데 대학때부터 사회운동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활발한 활동을 하던 두 사람이 만나서인지 결혼식은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풍물패가 난입하더니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도 했죠. 주례를 보던 모 사회운동가 선생님은 수십년 주례를 해왔지만 이런 결혼식은 처음봤다고 하여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두 사람은 대구의 처갓집에 들렀습니다. 그날 어른들이 하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왠지 화가 났습니다.
"전라도놈이라서 그런지 OO도 안하네."
나는 긴장한 새신랑과 이야기를 꽤 재미있게 나누고 사람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른들은 무언가 심사가 꼬였던 모양입니다. 이러쿵 저러쿵 뒤에서 안좋은 소리를 하는 걸 들으니 무척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말끝마다 '전라도놈'이라는 욕이 담겨있으니 말입니다. 경상도 놈이나 서울 놈, 부산 놈이라면 욕을 안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안했겠죠.
4. 화려한 휴가
5. 18을 정면에서 다룬 영화인 '화려한 휴가'가 오는 7월 26일에 개봉한다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니 또 불편해졌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는 영화 그만 만들었으면 합니다. 어차피 아시는분들은 다 아실텐데 굳이 다시 한번 각인 시키는거 이젠 그만했으면 하네요..물론 영화의 의도는 이런게 아니겠지만."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집안의 어른들이 그렇고 제 고향에 있는 많은 사람들, 많은 대학생들이 그렇습니다.
"울 신랑은 부산 서구사람인데 광주사태 다 지어낸 애기 영화 만든다고 비웃습니다. 저 고등학교때 군인들 총 맞고 죽은 학교 친구 8명 이름이 아직도 선한데 울 신랑은 지어낸 애기라네요. 일본 역사왜곡 아무것도 아니네요."
"저는 84년도 태생입니다만.. 저런 영상물을 보고서야, 그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역사속의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고, 저희가 있겠지요. 그런 의도와 취지이겠지요."
"역사적인 영화인데..꼭 봐야죠. 우리 어머니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전라도.. 광주사태..이렇게 얘기하면 별로 안좋게 생각하십니다. 다 옛날에 언론과 정권의 박자에 놀아났던 사람들이죠. 엄연히 피해자입니다."
"솔직히 광주사람에겐 너무나 잘아는 이야기이지만 아직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사람이 훨씬더 많습니다. 이 영화 꼭 흥행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민주화운동에 대해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
다른 누군가는 왜 하필 지금이냐라고 불만을 가집니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고 왜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 영화를 개봉하냐고 비판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호남권 민심 주도하는 영화, 반전을 노리는건지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영화를 꼭 선거철에
내놓는 의도가 뭔지 궁금하다."
"대선 있는 해에 교묘하게 이런거 만들어서 맨날 대중이 광주 이야기하는 넘들 니들 똥줄 타겠지 올해만 지나봐라 ㅎㅎㅎㅎ
니들이 10년동안 추악한짓 만천하에 까발려 지니까."
저는 오히려 대선이 있는 해에 당연히 이런 영화가 나와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둘러대고 말을 흘리는 정치가와 언론들의 술수에 속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 당시의 일을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는 수단으로서 영화는 아주 적절한 수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정치적 의도의 논란을 떠나서 이런 민감한 사실을 다룬 영화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정면으로 5. 18을 다룬 영화가 있었습니까? 아시아 최고 수준의 민주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에서 아픈 과거사를 다루지 말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오래전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비디오 테입은 당시 독일 기자가 목숨을 걸고서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후에 한국의 정보기관에게 린치를 당한 나머지 몸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목숨을 걸고서 알리고자 했던 사실보다 지금의 정치적 의도 논란이 더 중요할까요? 그 독일기자에게 폭력을 가했던 그 사람들이 숨기고자 했던 그것이라면 지금의 우리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무엇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국민의 상당수가 자신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을 지 모르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있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나는 우리 집안의 어른들이 '화려한 휴가'를 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국민이 보고서 좀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합니다.